티스토리 뷰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지하철이나 또는 터미널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용기있는 분들을 만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가 좀 잘못된 종교에 미친사람이라고 말하죠.믿는 사람들 조차 지혜롭지 못한 전도방법이라고 쉽게 판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디모데후서 4:2)[개역개정]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님을 증거하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노아는 자기 식구 7명 외에는 단한명도 인도하지 못했지만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며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전도했습니다.우리는 그저 말씀에 순종해서 전하면 되는 것이죠.

 광인처럼 보이는 최춘선할아버지는 30년을 맨발로 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하신 분이십니다.
잡지와 신문을 오려 손수 만드신 전단지를 가지고 영하10도까지 떨어지는 날씨에도 맨발로 지하철을 오고가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비아냥거림과 비웃음과 무시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가엾다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때문이였을까요? 그걸 느끼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할아버지의 꽁꽁 얼은 발이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그분이 남기신 마지막 말씀 '충성은 열매 가운데 하나요.

 그리고 부자와 권세에 대한 메세지.'세상에서 부러운 사람이 없고 무서운 사람이 없고 미운사람이 없고 보기싫은 사람이 없고 얼마나 감사한지요. 부러운 사람이 없는 사람은 법률없이 1등 부자예요. 미운 사람이 없는 사람은 1등 권세예요.세상 왕들의 억만배 권세예요.' '최춘선할아버지는 팔복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맨발의 성자(聖者), 맨발천사로 불리는 최춘선 할아버지!

 그는 처음에 지하철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인(狂人)일 뿐이었다. 걸인과 같은 모습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찬 종이를 온몸에 두르고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나 “미스 코리아 유관순! 미스터 코리아 안중근! Why two Korea?”라고 외치고 다녔다. 더군다나 혹한의 추위에도 맨발로 다니는 모습은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무슨 임무라도 띤 듯 그렇게 30년 동안 매일같이 지하철을 누볐다.

  그러나 그는 일본 와세대 대학을 나왔고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수재였으며 김구선생을 도운 독립운동가였다. 움막에서 기거할 것 같은 할아버지는 한남동 번듯한 주책에 살고 있었고, 5남매를 목사와 교수 등으로 길러냈다. 큰 부잣집 아들이었던 할아버지는 김포공항으로 들어가는 큰 길에서 인천 국도까지 수십만평의 땅을 유산으로 받기도 했다.

  도쿄 유학 중 할아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이후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했다. 6.25 직후 길에 떠도는 노숙자들과 거지들을 집으로 데려와 거두었고, 국가나 단체의 보조 없이 고아들도 많이 길러냈다. 내일 아침 먹을 쌀만 남았을 때도 누가 와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 그마저도 퍼주었다. 아내가 “우리 아이들은 무엇으로 먹이냐”고 걱정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다 먹이신다고 기록되어 있다”면서 달랬다.

  유산으로 받은 땅을 실향민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조금씩 떼어주고서 남은 건 단지 3천평 뿐이었다.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믿었기에 등기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누군가 그 땅을 자기 앞으로 등기해 남은 땅마저도 다 빼앗겨 버렸지만 힘든 표정 한번 짓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수백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데리고 서른번도 넘게 이사를 다녔다.

  할아버지는 독립유공자였기 때문에 도장만 찍으면 연금이 나오고 자녀들 대학 학비까지 나올 수 있었는데 신청을 거부했다. “보상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며, 아직도 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이므로 완전한 독립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할 뿐이다.

  어려운 살림에서도 하나님의 보살핌과 '천사같은' 아내의 헌신으로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냈으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지하철로 매일같이 나갔다. 종이 한장이라도 아끼기 위해 신문지 등에 자신이 직접 문구를 써, 허술하지만 깊은 의미들을 담긴 전단지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골목 어귀에 붙이고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렇게 그렇게 30년 동안 맨발로 다닌 것이다.


 

그를 세상의 빛으로 발견한 김우현 감독 

한낱 광인으로 기억될뻔한 최춘선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7년동안 좇아다닌 김우현 감독(42. 전 KBS 인간극장 PD. 사랑의교회 집사)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상으로 예수님의 근원적인 사랑을 전하고자 1992년 8mm 중고 비디오 카메라를 구입해 활동을 했으며 36세에 처음으로 방송일을 시작하다 KBS '인간극장' 등을 연출했다. 

  김우현 감독이 최춘선 할아버지를 최초로 만난 것은 1995년 7월이었다. 걸인과 같은 모습에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찬 종이를 온몸에 두르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비의 초대. 예수그리스도의 자비의 초대"를 외치면서 맨발로 걸어다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해를 걸러 만날 때마다 참 신기하게도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날 수 있었고, 만나면서 점점 할아버지의 말이 영혼 깊숙히 파고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그가 사는 한남동으로 찾아간 김 감독은 움막이 아니라 번듯한 집에 놀랐고 그의 아내로부터 듣는 할아버지의 옛 얘기에 더욱 놀랐다. 동네 아이들은 할아버지를 친근하게 바라봤으며 동네 곧곧에는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전단지들이 붙어있었다.


  김 감독이 마지막으로, 그것도 우연하게도 최춘선 할아버지를 본 것은 2001년 9월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하철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다녔다. 그러나 목소리는 쇄했으며 많이 수척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 온화한 모습은 여전했다. 김 감독은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발을 만져볼 수 있었고 할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만난 김 감독에게 신문광고 문구로 쓰인 '생명'이란 단어를 떼어주었다. 지하철이 들어오자 할아버지는 “충성은 열매 가운데 하나요”라는 말을 남기고 아주 먼 곳으로 가듯 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흘러가는 차창 너머로 할아버지는 마치 작별인사라도 하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셨다.

  김감독와 헤어진 할아버지는 1호선 수원행 열차에서 전도하다가 의자에 앉은 채로 평온하게 돌아가셨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의 곁으로 말이다. 그리고 대전국립묘지 제2애국지사묘역에 모셔졌다.

 

팔복(八福) 프로젝트

김 감독은 주님을 사랑을 전하는 데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방송일을 중단했고 2003년부터 '팔복'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팔복 정신을 영상으로, 사진으로, 글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2003년 여름 '팔복(八福)-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으로 34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완성, 홈페이지 '버드나무(
www.birdtree.net)'올렸다.

 이 영상물이 네티즌 사이에서 퍼져갔고 교회에서까지 상영되면서 큰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듬해인 2004년 9월6일 국내 유일의 기독교 영화제인 서울기독교영화축제 기독교프로파간다 초청전에서 김 감독의 다큐3편을 상영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상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 말 김 감독는 '맨발천사 최춘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을 출간했다. 버드나무에는 감동의 댓글이 이어졌으며 책 출간 이후 팔복 원정대가 결성됐으며 공식 홈페이지(
http://palbok.godpeople.com)도 생겼다.

  김 감독은 할아버지를 카메라에 담는 과정에서 왜 그가 "미스코리아 유관순! Why Two Korea’, ‘미스터코리아 안중근! Why Two Korea"라고 외쳤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안중근 유관순 같은 분들이 참 한국인이며 그런 이들만 계신다면 왜 두 개의 한국이 있겠느냐’는 의미였던 것이다. 또 30년간 맨발로 다닌 이유도 "남북통일이 되기 전엔 절대로 신발을 신지 않겠다"라는 것도 알아낸다.


 김 감독은는 그의 삶을 묵상하면서 이사야 20장3절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다니면서 이집트와 에티오피아에게 표징과 징조가 된 것처럼”에서 그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 처럼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조롱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 이 시대 이사야인 것이다.
  김 감독은 이처럼 귀한 삶을 살다간 할아버지를 누군가는 기록해야 했고 예수님은 자신을 도구로 사용했다고 고백했다.

“1995년 지하철 역에서 최춘선 할아버지를 우연히 보았고 2001년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도 모두 우연이었지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죽음의 문턱에서 신앙으로 회복하고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위엄있고 힘찬 목소리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한 진정한 ‘팔복’의 주인공이었습니다.”


팔복 - 최춘선 할아버지 (Part 1)


팔복 - 최춘선 할아버지 (Part 2)


팔복 - 최춘선 할아버지 (Part 3)

 
팔복 - 최춘선 할아버지 (Part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