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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TV뉴스를 보는데 100년 넘게 짓고 있는 건물이 있으며 지금도 건축중에 있는데 완공은 앞으로도 200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했다. 화제의 건축물은 스페인 바로셀로나에 짓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 성가족 성당) 성당이라고 합니다. 자료를 찾다가 [성가족 성당]에 관한 글이 있어 퍼왔습니다.



[퍼온글] 출처 :  http://blog.daum.net/windy20/12159057

1926.06.10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이코르네트(1852-1910), 전차에 치어 세상 떠남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르 꼬르뷔제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로 손꼽히는 안토니오 가우디 이 코르네트는 1926년 6월 10일 사망했다. 

17세 때부터 건축을 공부한 그는 건축대학 재학 중 철학과 미학 과정을 수료하면서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시각 외에도 예술적인 안목을 키워 나갔다. 1877년 졸업시 이 대학 학장은 가우디에게 "내가 지금 건축가라는 칭호를 광인(狂人)에게 주는 것인지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이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발한 발상과 창의성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 

그의 천재성은 당시대인들에겐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현대건축 초기 거장으로 손꼽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유분방하고 자연주의적인 그의 건축성향은 오늘날의 건축에 더 영향을 주었다. 당시 유럽에서 풍미하던 아르누보 운동 근간에 초현실주의 이상적 실천을 합해 놓은 강렬하고 직감적인 조형감각은 시대를 앞서나가는 것이었다. 그 결과 현재는 고독과 정열을 상징하는 스페인 예술계의 독보적 존재로 꼽힌다. 

1884년 착수, 아직도 건축 중인 필생의 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가 가장 대표적 작품. 도저히 공동주택 같지 않은 독특한 양식을 뽐내는 카사 바트로(1907년 완성)와 카사 미라(1907년 완성)도 그의 명작이다. ‘고독과 열정의 천재 예술가’의 살아있는 숨결.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긴 법이다./매일신문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카사밀라'는 가우디의 1910년 작품으로 지금도 주민들은 90년된 아파트에 자부심을 갖고 거주하고 있다.

1883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짓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도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가우디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바르셀로나의 모든 사람이 울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바르셀로나의 주거 문화와 풍경을 바꾼, 그 도시 이미지를 만든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직선은 인간의 선이며, 곡선은 신의 선이다'
란 유명한 말을 남기며 세계 건축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던 건축가
신과 인간의 경계에 있었다고 일컫어질 만큼 경이로운 건축을 했던 천재적 발상과 능력
바르셀로나는 축구팀과 가우디가 먹여살린다고 하는 농담이 있을만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전세계에서 그의 건축물을 보러 오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게 만든 장본인바로 역사상 전무후무하다시피 할 정도였던 천재적 영감을 보여준 안토니오 가우디에 대한 칭송들입니다.

아르누보 건축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건축물들은 보기만해도 대단하다는 찬사밖에는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1926년 전차에 치어 74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가 보여준 건축물들은 건축 그 자체를 뛰어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건축의 천재였지만 실내 디자인과 장식, 가구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전방위적인 예술가였습니다.

주물제조업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어렸을적부터 건축 공부를 했던 그는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한 이후 자신만의 스타일을 살려 수많은 역사적 건축물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가우디가 민간 건축물로는 마지막으로 만든 카사 빌라의 전경과 내부 모습
하나의 커다란 돌을 깍아서 만든듯한 외형 때문에 현지에서는 '채석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합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구엘 공원>
구엘은 당시의 가우디의 후원자로 가우디가 마음껏 건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후원자였습니다.
바르셀로나의 전경이 한 눈에 보이는 이 곳은 건축 당시 주택용으로 설계된 곳이라 공원이라기보다는 정원의 느낌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

이것은 최후의 교회가 아니라 새로운 개념에 입각한 최초의 교회다

라고 그 스스로도 감탄해 마지 않았던.
건축 감독을 수락한 이래 40여년간 이 작업에만 매달려 있었던 건축물로
성가족이 봉헌되는 사원입니다.

1882년 시작되어 아직도 완공되지 않은 건축물로 3개의 입구(파사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
동쪽의 '탄생의 파사드'
서쪽의 '수난의 파사드'
남쪽의 '영광의 파사드'가 그 명칭입니다.

탄생의 파사드는 가우디가 완성하였고
수난의 파사드는 근 100년이나 걸려 1976년 완공
영광의 파사드는 아직 공사를 시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각 파사드는 4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최종 완공 시 총 12개의 탑이 세워지게 되고 이는 12사도를 뜻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31세의 나이로 이 건축물을 맡은 그는 전재산을 이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건축에 쏟아부었고 말년엔 거주지까지 공사 현장으로 옮기는 등, 이 건축물에 자신의 인생 후반부를 모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어지고 있음에도 이 건축물이 언제쯤 완공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구요.
(혹자는 후원 및 입장료만으로 지어지고 있는 재정적 이유라는 견해도 있더군요)


(당시 제가 보던 책에 이 건축물이 현대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소개되어 있는 바람에)
정말 사람들말대로 앞으로도 완공까지 200년은 더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희대의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살아 생전 꿈꿔왔던 이 건축물에 대해서 깊은 애정이 생기는건 어쩔 수 없는 듯 합니다.

언젠가 그와의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당신의 스승이 누구냐?' 라고
그러자 가우디는 창 밖의 풍경을 가리키며
'내 스승은 바로 저것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연과 함게 살아가도록 했으며, 생활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곧 나의 스승은 자연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 그대로 작은 조각 하나, 건축 자재 하나도 버리는 물건들을 적극 활용하여 시공을 했으며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축물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1926년 전차에 치여 사망한 후 로마 교황청의 특별 배려로 성자들만 묻히는 사그라다 피말리아 성당의 지하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후에도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의 건축물들이 사랑받을 수 있는건 독특한 그의 건축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추구한 그 정신과 노력이 승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합니다.

그 앞에서 인간의 위대함과 한계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가우디 [ Antoni Gaudí (i Cornet) ]

1852. 6. 25 스페인 레우스~1926. 6. 10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

 

 

자유분방한 형태, 풍부한 색채와 질감, 유기적 통일성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가우디는 거의 평생을 바르셀로나와 그 근처에서 일했으며 '성가족(聖家族) 교회'(Sagrada Familia)를 짓는 데 일생을 바쳤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생애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엘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구엘 저택과 구엘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 

2번째 시기에서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04)를 지었다. 그러나, 1902년부터는 이런 전통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건물들은 몇 가지의 뚜렷한 자연적·종교적 상징물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구조와 재료를 표현했다. 바르셀로나의 벨 에스과르드 별장과 구엘 공원, 콜로냐 구엘 교회는 내부 기둥이 외부 부축벽 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구조는 평형구조(equilibrated)로 일컬어지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나무가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구조의 기본 요소는 사선으로 미는 힘에 견디도록 설계된 비스듬히 서 있는 기둥과 미는 힘을 거의 받지 않도록 얇은 판과 타일로 이루어진 볼트 등이다. 그는 자신의 평형구조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 고층 아파트 건물에 적용했다. 카사 바틀로는 기존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특히 정면에 새로이 고안한 평형구조 요소들을 덧붙였다. 카사 밀라에서는 몇 층의 구조에서 마치 연꽃의 잎맥처럼 철근을 이용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주 그랬듯이, 그는 이 두 건물의 형상과 표면에 산이 많고 해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괴짜였지만 훌륭한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은 열렬한 반(反)카스티야주의인 '카탈루냐주의'로 일어난 정치부흥운동과 결합되었다. 이 두 운동의 목적은 카스티야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 밑에서 오랫동안 압박받던 카탈루냐의 생활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교회는 카탈루냐 르네상스를 종교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가우디가 전 생애를 바친 계획으로 1883년에 이 교회 건설을 위탁받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1910년 뒤에는 실제로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은둔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75세 때 그는 저녁기도를 하러 가다가 전차에 치어 죽었다. 

미완성된 성가족교회(계획되었던 탑 4개 중 하나만 세워진 트랜셉트만이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의 설계도와 모형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선기둥, 쌍곡면의 볼트와 측벽, 쌍곡포물면 지붕 등이 복잡하게 상징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이로운 성당 구조는 1960년대의 많은 엔지니어들과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콘크리트 골조물보다 가우디의 것이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초현실주의자와 추상표현주의 화가, 조각가들로부터 거의 무비판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영향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평형구조를 따르는 몇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다. 그는 국제주의 양식이 성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에게 다가온 디자인의 난관들을 헤쳐나갔던 무한하고 끈질긴 상상력 때문이었다.

 

평가

가우디의 작품들은 형태, 질감, 다색장식을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며 이 요소들을 자유스럽고 표현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가우디 건축의 복잡한 기하학은 그 건축 구조와 훌륭하게 일치되어, 외벽면을 포함한 전체가 마치 자연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 자연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전체적인 통일성에 대한 감각은 가우디의 생애를 말해준다. 그의 사생활이 바로 직업이었으며 건축예술에 관한 침착한 그의 비평은 삶의 예술에 관한 격언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을 송두리째 건축에 바쳤으며 그에게 건축은 모든 예술의 총체였다. 

G. R. Collins 글 

/네이트 백과사전  

"가우디는 바그너와 세잔 및 그 외의 예술가과는 반대로, 바르셀로나에서 혼자 혁명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우리는 지도 위에 카탈루냐의 위치를 표시하듯 미술사에서도 카탈루냐 지방의 위치를 표시함으로서, 다른 국가와 다른 분야의 천재들이 했던 모든 것, 앞서간 예술가들이 했던 모든 노력을 단 혼자의 재능으로 일궈낸 가우디를 발견하게 된다."

 

인용한 글은 1927년 푸란스시코 푸욜이 카탈루냐 출신인 가우디를 추모하면서 쓴 에세이의 마지막 문단이다. 약 일 년전인 1926년 6월 7일 가우디는 전차에 치어 3일 후인 10일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가우디는 너무 초라한 행색 탓에 아무도 이 거장을 알아보지 못해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말년에 건축 작업에만 몰두한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가우디는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성자들만 묻힐 수 있다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는 건축의 성자이면서, 실내 디자인과 장식 조각, 심지어 의자와 화장대에 이르기까지 제작한 20세기의 독창적인 예술가이다. 그의 전 작품에 드러나는 우아하고 기괴한 곡선과 다양한 자연의 이미지를 건축에 사용한 그의 '집'들은 피카소의 그림과 견줄 수 있는 건축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거대한 영혼과 작품은 당대보다도 세월이 지날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비록 실물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위대한 '작품'들은 도판으로 보아도 들어가고 싶고, 거닐고 싶고, 심지어 만지고 싶다. 건축물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린다. 그의 대표작인 ‘카사 바르토’, ‘카사 밀라’, ‘구엘 공원’, ‘구엘 별장’, ‘사그라다 파밀리아’ 는 미켈란젤로나 피카소, 바그너처럼 작품으로 남아있다. 건축은 인간이 살아가는 실용적인 공간이다. 벽에 걸어두고 보는 그림이 아니고, 음반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아니지만, 가우디는 건축물을 보는 이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1895년 바르셀로나 신도시계획 당시 세워진 연립주택으로 1910년 완성된 카사밀라의 1920년모습과 현재모습(1902)

 

1852년 스페인 레우스에서 태어난 가우디는 아버지가 주물제조업자였다. "내가 공간을 느끼고 보는 재능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와 조부와 증조부가 모두 주물제조업자였기 때문이다. 몇 대를 거쳐 내려오면서 건축가인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주물제조업자는 표면으로 부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가우디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전에 이미 공간을 본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설계도면에서 시작하여 부피를 창조해내는 조각가들이었다."

 

가우디는 자신의 재능을 타고난 유전자 덕분이라고 밝힌다. 가우디는 비록 가난한 집안에 병약한 소년으로 자랐으나 건축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가우디가 ‘가우디 건축의 성지’라고 불리는 바르셀로나로 간 것은 17세이며 건축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가우디가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는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가우디의 학교생활을 짐작해 하는 말이다. 학창시절,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논쟁과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학생이었다. 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생계를 위해 철 세공업과 같은 일을 시작했다. 물론 이 경험이 가우디 건축에 다 녹아 들어간다. 대장장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망치를 들고 쇠를 두들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자연미와 조형미의 조화를 이룬 구엘 공원


그는 조물주의 손으로 작업했다. 모든 건축물의 설계도면으로부터 시작된 가우디의 정신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꿈틀거리는 건축물들은 조각 작품으로 변신한다.

 

'구엘 별장' 정면의 철제문은 철 세공품이다. 철문을 장식하고 있는 용의 몸체는 휘어진 철봉으로 표현하고 굵은 용수철을 휘감았다. 용의 다리들은 돋을무늬로 세공한 비늘이 덮고 있고, 왼쪽 발에 움직이는 연접 장치를 하여 문을 여닫도록 만들었다. 주물제조업자인 선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그의 표현이 딱 맞아떨어진다. 선대의 피가 가우디라는 예술가를 탄생시켰으니, 그의 독창적인 건축물들도 문득 튀어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전통에 의해서 탄생한 바로셀로나의 작품이기도 하다.

 

 

 

 

피렌체의 메디치 대공이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처럼, 구엘이라는 부자가 가우디의 이상적인 후원자였다. 구엘은 직물업계의 거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우디가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투자한다. 그의 이름이 붙은 별장, 궁전, 공원이 가우디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탁월한 작품이었다. 경제적인 후원을 구엘에게서 받았다면, 건축학적으로는 이슬람의 건축 양식과 아르누보 그리고 비올레 르 뒤크의 이론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뒤크의 <프랑스 건축 사전>은 그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가우디는 뒤크의 가르침을 모든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개성으로 수정 보안한다. 뒤크의 책을 통해 습득한 고딕양식은 '테레사 학원'의 모든 층에서 잘 나타난다. 테레사 학원은 청빈한 수도사들의 건물답게 가우디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만든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독창적인 건축기법이 잘 살아있다. 

 

평론가들은 가우디의 작품을 1890년대를 경계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 가우디의 진가는 후반부에서 빛을 발한다. 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건축물들은 후반기의 작품들이다. 특히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가우디'라고 명명할 수 있는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즉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건축에 사용된 모든 재료들이 하나의 생명력으로 재탄생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건축사에서 독특하면서 역동성이 넘치는 건축물들이다.

 

 

 

색체는 빛의 고통이라는 괴테의 말처럼 가우디 역시 건축 색감을 중요시했다. 가우디는 말한다. "건축은 색깔을 거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형태와 부피를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색깔을 사용해야 한다. 색깔은 형태를 보안해주는 동시에 가장 분명하게 생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가우디의 ‘카사바트로’ 기와의 색감을 보면 단순히 화려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자연의 색감을 느낄 수 있다. 부자들의 전원주택으로 설계된 구엘 공원에서는 자연미와 조형미의 절묘한 조화를 색감을 통해 보여준다. 소나무, 떡갈나무, 종려나무, 백리향 등의 나무와 재스민, 등나무 같은 덩굴식물, 건축자재로 사용된 타라고나 지방의 마른 돌멩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각각의 고유한 색과 불규칙한 배열이 자연의 풍경에 녹아 들어 있다. 구엘 공원은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가우디는 평생의 역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를 건축할 때 예술가로서 날개를 달았다. 그 자신도 이 건축물에 감탄하면서 전통적인 고딕 양식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가우디가 이 대단한 건물의 감독직을 수락한 것은 1883년 가을이었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 간 이 작업 만에만 몰두했다. 이 건축물은 서적상이자 발행인인 호세 마리아 보카베리야가 주도한 일이었다. 그는 성가족이 봉헌된 사원을 바르셀로나에 짓기로 결심하고 기금을 모아 당시 교구 건축가인 프란시스코 데 파올라덴 빌랴르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빌랴르가 건축의 기술 고문인 마르토렐과의 불화로 사임을 하자 가우디가 일을 맡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1955년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가우디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간이며, 손상된 인간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을 위해 사용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다. 말년에 가우디는 건축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을 멀리하고 수도자처럼 살았다. 건축가로서의 명성과 열정이 종교적인 신성과 결합하여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건축물은 가우디 사후에도 계속 건축되고 있다. 가우디는 성가족 교회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세 개의 파사드를 만들었다. 동쪽은 탄생의 파사드, 남쪽은 영광의 파사드, 서쪽은 수난의 파사드이다. 가우디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첨탑이 빠진 탄생의 파사드만 완성된 상태였다. 이 파사드의 중앙 문은 사랑, 오른쪽은 믿음, 왼쪽은 소망의 문이다. '사랑, 믿음, 소망'이라는 신의 음성이 들려오는 문 앞에 서 있는 가우디를 상상한다. 그의 영혼이 깃든 건축물들을 통해 영원불멸의 신성을 잠시 엿본다.

 

 

 

 

가우디는 평생 강연도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은 건축가였다. 그러나 가우디가 지었다고 소개되어 있는 책이 있다. <가우디, 공간의 환상>(이종석 역, 다빈치)은 가우디가 청년시절에 쓴 논문초고와 만년에 그를 방문했던 이들에게 남긴 말들을 모으고 정리한, 가우디의 건축관을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더불어 그의 건축세계를 141개의 컬러 도상으로 함께 볼 수 있다.

 

가우디, 공간의 환상가우디 - 예언자적인 건축가안토니 가우디

 

 

19세말 유럽 및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 양식인 아르누보 전문가인 필립 티에보의 책 <가우디- 예언자적인 건축가>(김주경 역, 시공사)는 가우디의 건축을 중심으로 작품 세계를 설명한 책이다. 아르누보는 장식을 중요시한 가우디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로니에 북스'에서 나온 <안토니 가우디>(마리아 안토니에타 크리파 저, 이영주 역)도 가우디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가우디와 관련된 책을 펼쳐 읽으면 글보다도 건축물에 압도당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는 말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을 손으로 '짓는' 사람이었다.

 

출처 : 추억속으로  |  글쓴이 : 그림자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