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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금식을 하는 것은 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자기 주장을 사람들에게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거나 아니면 살을 빼기 위해서이다. 물론 이런 목적들 때문에 금식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금식들이 경건의 훈련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자신의 금식을 통해서 사람들을 움직이려는 금식이거나 외모나 건강을 위한 금식일 뿐이다. 

 

경건의 훈련으로서의 금식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중심거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금식하라. 적인 금식이다. 신앙적 금식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그분이 주도하시는 금식이다. 존 웨슬리는 “금식을 하려거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금식하라.

 

 

우리의 금식의 목적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금식의 첫째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금식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교만, 분노, 원한, 시기 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있다면 금식 기간 중에 표면으로 떠오를 수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원하는 사람에게 영적으로 큰 유익을 준다. 
우리의 약점들이 드러날 때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드러난 거짓 주인들을 우리 밖으로 몰아내시기 때문이다.  

 

금식이 주는 또 다른 유익들이 있다. 금식은 인간적 욕망을 억제하는 효과를 준다. 
금식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집중적으로,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더 민감하게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신체적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다른 경건의 훈련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금식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히 11:6).  

 

금식할 때 굳이 혼자서 외롭게 할 필요는 없다. 
경건의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들과 함께 금식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할 때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훨씬 커질 수도 있다. 
교회, 교파, 심지어 국가 전체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금식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연합하여 금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심각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교회가 있다면 집단적 기도와 금식을 통해 치유를 얻을 수 있다. 

 

1756년 존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프랑스의 임박한 공격에서 건짐 받기 위해 영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기도했다. 
결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던 영국인들은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금식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임신이나 수유(授乳) 중인 여성 또는 특정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금식을 피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금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흔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단순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금식은 아니다. 
금식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영적 훈련의 한 방법이다. 
우리는 금식의 의미를 보다 더 확대하여 이해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집중적인 영적인 활동을 위하여 일상적인 것들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때때로 대중매체를 스스로 삼가야 할 필요도 있다. 
우리는 극심한 소비주의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께서 특히 사랑하시는 사람들 곧 상처받은 자, 파산자, 억눌린 자 등과 함께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기보다는 그들에게서 배우기 위함이다. 
우리의 시간을 너무나 많이 빼앗아가는 전화를 삼가야 할 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일을 삼가야 한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삼가야 하고, 또 때로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우리가 생활의 어떤 부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으면, 그분이 가르쳐주실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 때 그분이 인도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성경은 금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성경에 의하면, 모세, 다윗, 엘리야, 에스더, 다니엘, 바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였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베푸는 것, 기도 및 금식에 대해 가르치실 때 그것들을 거의 잇따라 언급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당연히 금식할 것이라고 전제하시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할 것인지에 대해 가르치셨다(마 6:1-18)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 존 칼빈(1509∼1564), 존 녹스(John Knox. 1510?∼1572) 및 존 웨슬리 같은 역사상 위대한 신앙인들도 금식을 했다.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풀리지 않는 영적인 문제들이 금식을 통해 풀릴 수 있다. 금식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통로이므로,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성실성에 대하여 
‘성실성’이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성실성이란 단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에는 “성실성이란 선한 분 곧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도 성실성(순전함)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인데, 이것은 외부적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네 눈이 성하면(순전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라는 예수님의 비유적 표현에서 ‘순전한 눈’은 성실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 성실성이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실한(순전한) 삶이다. 

 

‘순전한 눈’은 하나님께 집중하여 그분을 중심으로 삶의 모든 것들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은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신다. 
성실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분의 백성과 교제하고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실성이 바람직하고 참되고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믿게 될 때, “주 예수님, 저는 주님이 저의 삶의 중심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저의 교제 가운데 모든 삶의 결정들이 내려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무슨 일이든 할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이렇게 온전한 헌신의 자세를 취할 때 하나님은 그분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성실성이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삶이며, 겉으로는 아무리 선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뜻에 맞지 않으면 거부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뜻과 관계없이 그것들을 행하는 것은 불순종이다. 
내가 성실성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자 전에는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이 
오히려 중요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심지어 내가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주님께 물을 때마다 
그분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 특히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하지만, 주님 그렇게 하면 이 좋은 기회들에게 ‘노(No)’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면, 
그분은 “너는 네 중심적인 삶을 살려고 하느냐, 아니면 내게 순종하겠느냐?”라고 계속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성실성의 훈련을 할 때 이처럼 우리의 시간 관리에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 
시간 관리처럼 변해야 하는 것이 또 있는데, 그것은 돈에 대한 태도이다. 
우리 시대의 큰 우상들 중 하나는 바로 돈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돈은 ‘정사와 권세’(엡 6:12)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영적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돈’이라는 우상을 이기지 못하면, 그것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은 돈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돈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이기고 그것을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돈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돈은 단순히 ‘물질의 교환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 곧 물질적 탐욕이 잘못된 것이다. 
성실성은 돈 문제에도 적용이 되는데, 내게 모든 것이 있다 할지라도 나의 소유는 아무것도 없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어도 그것에 대한 지배권은 내게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값없이 돈을 받았던 것처럼 값없이 그것을 베풀어야 한다. 
돈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이다. 

 

 

 

 

 

성실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요구되는 영적 훈련의 덕목이다. 
이것이 구체적인 삶에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는 것은 사람들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돈 문제의 경우,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집 문제를 말하자면, 나의 경우 큰 집이 필요 없다. 우리 가족은 네 명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가족을 거느린 사람, 대규모로 손님을 접대해야 할 사람, 
숙박을 해야 할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나보다 큰 집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나처럼 작은 집에서 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물질의 문제에 있어서 외형적 행동보다 내면적 자유와 성숙이 더 중요하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은 사도 바울처럼 성숙하게 될 것이다. 
그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말했다. 
돈이 있든 없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풍부하면 풍부한 대로, 궁핍하면 궁핍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