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성공을 다르게 정의한다. 성공을 향해 가는 길도 다르고, 간혹 길을 벗어났을 때 돌아오는 방법도 다르다. '아딸'이라는 상호로 더 잘 알려진 (주)오투스페이스 이경수대표(43세)는 전국에 8백여 체인점을 가진 이른바 성공한 사업가다. 10여 년 동안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낸 그의 창업 스토리는 최근 사회 언론을 통해서도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창업은 신중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평생 이룬 가정과 재산을 한순간에 잃을 수도 있죠." #그가 생각하는 성공 그는 창업을 권하지 않는다. 성공이 쉽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 이정원목사(신림침례교회)는 늦깎이 목회자였다. 신학을 시작한 것이 그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후 여러 교회를 개척하는 동안 가난은 자연스럽게 그의 가족..
베스트셀러 신앙 간증집 『땅끝의 아이들』의 저자 이민아 목사가 3월 15일 오후 별세했다.(53세) 지난해 5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고인은 세 달 후인 8월 신앙 간증집을 펴내며 세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딸이라는 개인적 배경, 김한길 전 국회의원과의 결혼과 이혼, 자신의 암 발병, 애지중지하던 큰 아들을 잃은 사연 등 이루 말로 표현 못할 불운과 역경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낸 사연에 대중은 크게 공감했다. 간증집은 지금까지 11만 부가 팔려 종교 서적으로는 이례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독자들은 “가슴이 뭉클하다” “반복해서 이민아 변호사의 글을 읽게 된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고인은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가 그의 어머니다. 이화여대 영..
신호범 박사 약력 1935년 경기도 파주 금촌 출생 1939년 모친을 잃음. 부친은 행방불명 1953년 미군 군의관 레이 폴 대위에게 입양, 한국을 떠남 1954년 대입검정고시 브림감영, 피츠버그 대학 워싱턴 주립대학 동양학 박사 건국대, 군산대, 조선대,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정치학 박사 하와이, 쇼어라인, 메릴랜드 및 워싱턴 주립대학 교수재직 워싱턴주 무역고문 워싱턴 주 한인회장 평화통일 자문위원회 서북미지역 회장 93~94 워싱턴 주 하원의원 워싱턴 주 상원부의장 외 다수 겸직 2004 해외동포상 특별상 수상 동양계 최초로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소수민족에게 희망의 전도사가 된 신호범. 그러나 그의 성장사는 고단하고 불우했다. 서울역 거지생활로 시작해 미군..
고승덕변호사(1) - 신앙간증요즘 한나랄당 전당대회 돈봉투사건을 폭로함으로 메스컴에 오르내리는 고승덕 국회의원그 분의 신앙간증을 들어보시죠 고변호사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교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때부터 일등을 독차지했던 수재였다. 서울대에 들어가면서 인생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얼굴이 못생겼고 검으며 말주변도 없음을 불평했으며 사람이 왜 사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 2학년 때 사시에 합격 이어서 외무고시 2등, 행정고시 1등,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교내 기독학생회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인생에 대한 의문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승덕 국회의원, 변호사 약력 출생 : 1957년 1..
탈랜트 박탐희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잠깐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2001년에 친구로부터 그녀를 위해 기도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고 한다.난 누구이며 왜 존재하고 있나? 기도해준 친구한테 교회 한번 나가보겠다고 말하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에 가자마자 리더를 맡게 됐다. 동기를 모아놓고 제비뽑기를 했는데 리더로 뽑혔다고 한다.그해에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탐희씨에게 심한 상처가 생기는 어떤 사건이 있었다 . 넉 달 동안 세상과 단절 외롭게 투쟁하면서 힘들고 속상해서 하나님께 막 따졌다고 했다.‘제가 왜 살아야 해요? 이 몸이 성전이라고 하셨죠? 망가뜨릴 거예요’ 하면서 투정을 부렸다. 그러다 잠이 들었는데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한..
저자 이어령교수 프로필 1933년 12월 29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호적에는 1934년 1월 15일로 올라 있다. 1956년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문학예술》지를 통해 등단했으며,〈우상의 파괴〉를 발표했다. 1960년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를, 1987년에 단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부터 이화여대와 인연을 맺어 석좌교수, 석학교수를 거쳐 2001년에 스스로 퇴직했다. 1990년에는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했고, 2009년에는 경기도 디지로그 창조학교를 설립, 명예교장을 맡고 있다. 1960년, 28세라는 젊은 나이에〈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조선일보〉〈한국일보〉〈중앙일보〉〈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72년,《문학사상》을 창간호부터 1985년까지 주..
이민아 변호사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딸로 1959년에 태어났다. 이 변호사는 1981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조기 졸업한 후 김한길 전 국회의원과 결혼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도 이 변호사의 영재성은 빛을 발해, 미국에서 로스쿨을 수료하고 캘리포니아 주 검사로 임용돼 청소년 범죄 예방과 선도에 헌신한 이 씨는 1989년부터 2002년까지 LA지역 부장검사를 역임했다. 세례를 받은지 3주만에 25세 된 큰아들 유진 씨가 돌연사하는 시련을 겪게 된다. 하나님을 믿게 된지 3달도 안돼서 받은 암 선고와 둘째 아이의 자폐증으로 인해 지난 여러해 동안 눈물을 뿌리며 믿음의 여정을 걸어온 이민아 변호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넜듯이, 매일 매일 삶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며 걸어왔던 수..
1979년 MBC 공채 11기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뷰한후 드라마와 영화 라디오 DJ를 통해 많은 사랑 을 받았던 탤런트 오미희 집사는 경제적 어려움과 10년 동안의 재판, 이혼의 상처 등 숨기고 싶었던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방송국의 출연료가 가압류 당할 때는 사람들의 시선과 모멸감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차라리 그분을 몰랐으면 하는 불평도 했었으나 하나님을 알아서 그나마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제 생각해보면 감히 ‘그나마’가 아니라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서진규 박사는? 1948년 경남 동래에서 태어나 제천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 풍문여고를 졸업했다. 가발공장 여공, 골프장 식당 종업원 등으로 일하다가 1971년 가정부를 모집한다는 직업소개소의 광고를 보고 단신으로 도미했다. 1975년 결혼을 하고 이듬해에 미 육군에 자원 입대한 후 미국, 한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근무했다. 1972년 퀸스 칼리지를 시작으로 여섯 군데의 대학을 거쳐 1987년 입학 15년 만에 메릴랜드 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마흔 세 살에 하버드 석사 과정에 입학하면서 군인과 학자의 길을 함께 걷다. 1996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나이 예순을 한 해 앞둔 2006년 하버드 입학 1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현재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Motivationa..